물감의 시간은 어둠을 지나곤

“하지만 화가는 말하고자 시도하는 순간 힘을 잃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녹색에 푸른색 음영을 넣으면서, 덩어리 위에 덩어리를 배치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수족관 유리 너머에 있는 물고기처럼 고요히 베일에 쌓인 듯이 주문을 걸어야 될 것입니다.” 1


회화는 침묵의 예술이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2 의 이러한 생각에 누군가는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회화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장면이 그려졌다 할지라도 문학처럼 무엇인가를 세부적으로 설명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영화처럼 장면이 연결되면서 전체 흐름을 이루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회화는 고요하게 벽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금나래 작가의 회화 역시 그 고요함의 지평에 배치되어 있다. 다만 회화의 표면에서 물감의 두께를 드러내기 위한 두터운 캔버스는 여기에서 찾을 수 없다. 얇은 천은 캔버스의 뒷면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밀도를 가지고 있다. 표면이 지니고 있는 부피감은 최소한으로 줄어든 상태에서 물감의 부피가 대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캔버스를 잡고 있는 프레임이 확인될 정도로 얇은 표면에서 물감은 일반적인 회화가 그러하듯이 우리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시간 순으로 겹겹이 쌓여 부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보다 밝은 색으로 남겨진 움직임은 이 부피감의 방향에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는 물감이 어딘가 표면에서 막힌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기어이 표면의 물감을 다시 살펴보면서 우리는 이 물감이 캔버스 뒤에서 앞으로 옮겨 왔음을 알게 된다. 뒤집어진 캔버스 구조에서 작가는 일반적인 회화 제작의 방식처럼 회화의 앞에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뒤에서 서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물감은 작가에게서 벗어나 오래된 시간을 지나온 것이 된다. 캔버스 표면의 밀도를 지나오지 못한 물감들은 우리의 시야에 들지 못하기도 한다. 작가노트에서 밝히듯이 작가는 회화의 뒷면에서 ‘나와 그림 사이에 있었던 모든 사건을 낱낱이 드러’내지 않는 것을 택하였다.


작가는 말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관람자의 반대편에 자신의 자리를 잡는다. 표면에 남은 물감의 흔적은 자연스럽게 회화가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다는 암묵적인 매체적 조건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작가에게서 시작된 언어적 표현을 회화의 표면에 남기는 것이 아닌, 우연히 발생하는 회화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된다. 회화 자체를 주어의 자리에 옮기면서, 작가는 회화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일종의 필사자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회화의 언어는 음성으로 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수화와 같이 고요함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침묵처럼 보일 수 있지만, 움직임은 침묵이 될 수 없다.


표면의 수분이 마르기 전에 쌓이는 물감은 이내 음영을 만들면서 번지게 된다. 그리고 움직임의 흔적은 명백히 남아 있다. 이 움직임을 볼 수 있는 것은, 다시금 시작점으로 돌아가서, 얇은 표면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얄팍한 부피는 마치 유리 창문처럼 움직임을 추측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 움직임에 대한 뚜렷한 답을 내리는 데에는 빈번히 실패하게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화가의 언어에 대해 버지니아 울프가 수족관 유리를 비유한 것을 다시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깨지 못할 고요함 속에서 회화의 언어는 물 속의 흐름처럼 표면에 일렁임을 남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여기에는 어둠이 드리워져서 구체적인 형상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작가의 모습은 그 어둠 속에 사라지면서 어렴풋한 움직임만 남긴 채 말이다.


당연하게도 맞은 편에 어둠이 내릴수록 창문은 거울이 되고 우리의 모습을 비추기 마련이다. 어둠을 지나서 얇은 천에 남겨진 물감의 시간은 이제 우리가 읽어야 할 이야기이다. 회화의 언어는 언제나 고요하게 눈의 움직임으로 번역되곤 한다. 하지만 이 고요함이 곧 침묵을 뜻하지는 않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김맑음


  1. But painters lose their power directly they attempt to speak. They must say what they have to say by shading greens into blues, posing block upon block.
    They must weave their spells like mackerel behind the glass at the aquarium, mutely, mysteriously. “Pictures” (1925), Virginia Woolf, Oh, to Be a Painter! (NY: David Zwirner Books,2021), p. 38. ↩︎
  2. It would never occur to anyone with a highly developed plastic sense to think of painting as the silent art.
    “Pictures and Portraits” (1920), Ibid., p.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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